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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첫 주말,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운동 부족을 핑계로 이른 아침에 나선 등산. 정상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기억에 남았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컴퓨터를 켜고 싶지 않았다. 창밖 하늘이 너무 맑았다. 어제까지 덥다고 투덜댔는데 갑자기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등산화를 꺼냈다. 작년 봄 이후로 처음이었다.

가까운 산이라 큰 준비는 필요 없었다. 물 한 병, 초콜릿 몇 개, 보조배터리. 그리고 게임 생각은 집에 두고 가기로 했다.

시작은 후회였다

입구에서 십 분쯤 걸었을 때부터 후회했다. 숨이 찼다. 평소에 앉아서만 지내니 다리가 이렇게까지 약해졌나 싶었다. 앞서가는 할머니 한 분이 나를 가볍게 추월하셨다.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한 번 올라온 길을 되돌아가기는 싫어서 천천히 걸었다. 속도를 낮추니 숨이 정리되고,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뭇잎 끝이 막 노랗게 변하는 중이었고, 바닥에는 도토리가 굴러다녔다. 소리라고는 내 발소리와 새소리뿐이었다.

머리가 비는 시간

올라가는 동안 신기하게 생각이 사라졌다. 평소에는 샤워할 때도 걸을 때도 머릿속에 이런저런 걱정이 돈다. 오늘 할 일, 끝내지 못한 것, 어제 한 말실수 같은 것들. 근데 산길에서는 다음 발을 어디에 디딜지만 생각하면 됐다.

게임할 때와 비슷한 몰입이긴 한데 방향이 반대다. 게임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머리가 바쁘고, 산은 몸을 쓰느라 머리가 한가해진다. 둘이 서로 보완이 되는 느낌이었다.

정상에서 먹은 초콜릿

한 시간 반쯤 걸려서 정상 근처에 도착했다. 높은 산은 아니라서 풍경이 대단하진 않았다. 그래도 멀리 동네가 작게 내려다보이고, 바람이 차서 땀이 금방 식었다. 벤치에 앉아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그냥 편의점 초콜릿인데 이상하게 맛있었다.

옆 벤치에 아저씨 한 분이 김밥을 펼쳐놓고 드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서 목례를 했더니 김밥 하나를 권하셨다. 거절하기 어색해서 받아먹었다. 이런 일은 산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었다

올라갈 때는 숨이 힘들고, 내려갈 때는 무릎이 힘들다. 이건 사실 알고 있었는데 몸으로 겪으니 다르다. 중간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스틱 없이 온 걸 조금 후회했다.

내려오면서는 천천히 걸었고 쉬는 횟수도 늘렸다. 올라올 때 못 봤던 계곡 물소리가 들렸다. 급할 게 없으니 한참 앉아 있었다. 이 시간이 오늘 중 제일 좋았다.

집에 와서

집에 오자마자 씻고 침대에 누웠다. 다리가 뻐근했지만 기분은 가벼웠다. 오후에 컴퓨터를 켜서 한 판 했는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마음이 덜 급했다. 결과는 졌다. 그래도 별로 화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가기는 어렵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가보려고 한다. 달력에 표시도 해뒀다. 다음엔 스틱을 챙기고, 김밥도 하나 사 가야겠다.

다음을 위한 메모

기록해두면 다음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몇 가지 적어둔다.

  • 아침 일찍 가야 한다. 열 시가 넘으니 길이 붐비기 시작했다.
  • 물은 한 병이면 되지만 간식은 넉넉히 가져가는 게 좋다.
  • 내려올 때를 대비해 무릎 보호대나 스틱을 챙기자.
  • 휴대폰은 사진 찍을 때만 꺼내자. 한 번 꺼내면 계속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돌아오는 길에 먹은 칼국수가 정말 맛있었다. 등산의 절반은 내려와서 먹는 한 끼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땀 흘린 뒤의 뜨거운 국물은 어떤 보상보다 확실했다.